최고의 온천!
오랜 역사를 자랑합니다. 시간 되시면 아래를 한번 둘러보세요.
다카미야는 에도 시대 중기,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8대 쇼군에 취임한 1716년(교호 원년)에 창건되었습니다.
막부는 재정을 재편하고 통치 구조를 개편하는 교호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개혁은 지방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1717년 문서인 다카유 마을 기록에는 "당시 다카유 마을에는 온천 여관이 있었습니다. 긴축 정책으로 사업이 어려워졌고, 쇼토쿠 시대에 이어 두 번째 큰 화재가 발생하여 여관은 궁핍해졌습니다. 그러나 어떻게든 회복했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마가타 번주 호타 마사아키는 유황 온천이 풍부한 다카유 마을에 주목하여 경제 활성화를 꾀했습니다. 그는 산기슭에 있는 야마가타 남부 지역을 포함한 다카유 주변 지역에 자신의 성씨인 호타(布太)를 부여하고 "호타 마을(ほった村)"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후 다카유 마을은 "호타 마을 다카유(ほった村高湯)"로 개칭되어 오늘날의 주요 관광지로 발전하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에도 시대 후기에는 상업이 번성하고 이세 신궁 참배가 성행했습니다. 이로 인해 서민들의 이동이 활발해지면서 지역 곳곳에 여관과 숙박시설이 늘어났습니다.
"아즈마코 아킨도 카가미(あずまこあきんどかがみ)"라는 휴대용 목판 인쇄 책자가 발행되었고, "아즈마코(あずまこ)"라고 적힌 나무 간판이 있는 여관은 일반 여행객에게 세심한 환대와 편안함을 제공했기에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특히 다카유 온천에는 아름다운 풍경을 담은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책자에는 현재 다카미야 료칸을 나타내는 "야헤이"라는 이름 외에도 14곳의 다른 온천 여관 이름이 나열되어 있어 그 신뢰성을 뒷받침합니다.
이러한 책자가 등장하면서 여행이 더욱 활발해졌고, 많은 여행객들이 다카유 온천의 깊은 산골 지역을 방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즈마코 아킨도 카가미가 발간될 당시 다카미야의 주인은 오카자키 가문의 9대 당주인 야헤이 시게토모였습니다. 1836년(천보 7년), 약 10만 명이 사망한 전국적인 대기근이 마을 주민들을 강타했습니다. 시게노부는 잇따른 참사로 마을 주민들이 겪는 어려움과 온천 여관 운영의 이상적인 방향을 고민하며 후손들이 가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지침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유지에 9,999그루의 삼나무 묘목을 심었습니다.
그는 만 그루의 삼나무 묘목 중 한 그루를 의도적으로 빼놓음으로써, 한 그루만 더 심겠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다시 말해, 현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항상 미래를 생각하며, 결코 게으르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1859년(안세이 6년) 그는 "정원 가꾸기 지침"이라는 제목의 여덟 부분으로 구성된 문서를 작성했습니다. 시게노부가 남긴 이 훈계문은 오카자키 가문의 가보로 대대로 전해 내려오며, 여관 운영에 크게 활용되었습니다.
많은 황족과 작가, 시인이 다카미야를 애용하여 단골로 삼았습니다.
1941년(쇼와 16년)에는 미카사 친왕이, 1950년에는 다카마쓰 친왕이 묵었습니다. 이듬해, 아직 황태자였던 전 천황은 학창 시절 친구 세 명과 함께 나흘 동안 이 여관에 묵었습니다.
문호 기쿠치 간, 후카다 큐야, 동계 올림픽 3관왕 토니 세일러 등 저명한 VIP들을 맞이했으며, 앞으로도 따뜻한 환대의 정신을 소중히 간직해 나갈 것입니다.
2016년 창립 300주년을 맞이하는 미야마소 다카미야는 자오와 야마가타 관광 발전과 함께 쌓아온 신뢰와 따뜻한 환대의 정신을 영원히 기억하며 오랜 전통을 이어가는 료칸으로 운영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