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카사(飛鳥寺)는 오늘날 퇴락한 작은 절에 불과하지만 일본 역사에서 이 절이 갖는 의미는 엄청나게 크다. 건물이나 불상도 그 옛날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지는 않지만 어쩌면 아스카 답사의 상징은 바로 여기라고도 할 수 있다. 배불파와의 싸움에서 이긴 소가노 우마코는 다음해인 588년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켜 8년 뒤인 596년에 법흥사(法興寺)라는 대규모 사찰에 탑을 세우고 불사리를 안치했다. 이 절이 일본 역사상 최초로 등장하는 본격적인 사찰이며 오늘날의 아스카사이다.
아스카사는 왜(倭)가 바야흐로 불교국가로 성장했다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아스카사는 순전히 백제 기술자에 의해 건립되었다. 아스카사는 국가가 세운 관사(官寺)도 아니고 왕이 주도한 왕사(王寺)도 아니고 단지 소가씨가 발원한 씨사(氏寺)임에도 백제에서는 건축•토목•조각 기술자들을 대거 보내줄 정도인걸로 봐서 소가씨가 백제계 도래인이라는게 거의 틀림없다. 아스카사는 사방 200m에 달하는 거찰로 설계되었는데 착공 5년째인 593년, 쇼토쿠 태자의 섭정이 시작되던 해에 기초가 완성되었고 596년 드디어 목탑의 심초석(芯礎石)에 불사리를 봉안하고 기둥을 세우는 입주식을 갖게 되었다. 이때 열린 불사리 봉안식 모습을 라는 일본 옛 역사책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고 한다.
"아스카사의 찰주를 세우는 법요식에서 소가노 우마코 대신과 100여명이 백제옷을 입으니 보는 사람이 한결같이 기뻐했다."
마침내 불교라는 문명의 꽃이 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스카사 금당에 안치된 석가여래좌상은 높이 2.75m에 달하는 청동대불로 606년에 봉안되었다. 도리 불사가 제작한 불상은 얼굴이 길고 눈은 은행알 같으며 코는 높직하고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스카사는 건물도 불상도 옛모습을 지키지 못하고 645년 소가씨의 몰락과 694년 후지와라쿄로 도읍을 옮기면서 아스카사는 서서히 쇠퇴해갔다. 1196년에는 벼락이 떨어져 아스카사는 불타고 말았는데 대불은 산산조각난 상태로 오랜 세월 비를 맞았다고 한다. 그런 상태로 약 630년을 더 보내다가 1825년에 와서야 현재의 본당을 지은 것이다. 대불은 얼굴의 윗부분과 오른손 일부만 도리 불사 제작 당시의 모습이고 나머지는 후대의 보수인데다 점토로 만든 부분도 있다고 한다.
아스카사 서쪽 문으로 나오면 들판에 작은 사리탑이 서있는데 소가노 이루카의 묘탑이라 전해진다. 그의 전횡에 대한 미움 때문인지 이루카가 살해될 때 그의 목이 500m나 떨어진 여기까지 날아왔다는 전설이 있다.
일본 최초의 사찰인 아스카데라는 창건 당시엔 사방 200m에 달하는 거대한 사찰이었습니다. 쇼토쿠 태자의 오른팔인 친백제파 소가가문이 건설한 아스카데라는 백제 위덕왕이 보낸 백제 장인
드림팀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건설되었습니다.
아스카 문화의 산실은 백제였고,
아스카 지역의 완만한 산세에서 충청도 내포지역의 냄새가 나는것으로 보아 많은 백제계 도래인이 고향같은 아스카지역에서 활동했을 것으로 유추됩니다.
아스카-나라-교토는 여행하는 순서가 중요하다. 먼저 아스카 지역을 보고 그 다음에 나라로 가고 그리고나서 교토로 가야된다. 아스카 대불이 분명히 역작임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수많은 불상과 유물은 보고 난 다음이라 그런지 왠지 작아 보이고 투박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스카대불은 중엄하고 친근한 맛이 있어 계속 보게 된다.
이 사찰을 규모가 큰 사찰로 생각하고 간다면 실망할지도 모르는 작은 절이다.
다만 주변의 다른 절과는 미묘하게 다른 한국적인 느낌이 있는 절이다.
이 곳에 갔을 때는 마침 지역에서 야간개장(심지어 무료였다.) 을 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알차게 보고 왔던 기억이 있다.
한국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들리면 좋을 듯한 장소이며 아스카역 인근에서 자전거를 빌려 다카마스 고분부터 석무대, 아스카데라까지 달려보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 될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