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까마쓰(高松) 고분 입구에 커다란 소나무를 심은 것이 다까마쓰를 뜻하는 것을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실물크기로 복원한 고분 내부의 벽화는 교과서 도판에서 보았던 현무 등 사신도와 천장의 별자리, 특히 여인 군상도는 고구려 벽화에서 보고 느꼈던 그대로였습니다.
고분 조성시기가 고구려가 멸망한지 40년이 지난시기라고 고증되었습니다. 이는 고구려 멸망 후 대규모로 아스카지역으로 이주한 고구려계 귀족 도래인의 무덤이라 추측해봅니다.
고구려는 아스카 문명에 일조한 혜자와 담징 등 학승과 기술자를 파견하여 일찍부터 백제와 더불어 쇼토쿠 태자의 아스카 문명과 문화발전 혁신에 일조하였습니다.
아스카 문화는 백제를 비롯한 한반도 삼국의 영향이 크게 미쳤다는 것은 다카마쓰 고분에서도 느낄수 있었습니다.
일본 국보인 이 옛 무덤은 1972년 가시하라 고고학연구소가 이 일대를 조사하다 발견한 것이다. 일본 유물에서는 그동안 볼 수 없었던 고분 벽화가 부장품들과 대거 쏟아져 나와 일본 사회는 ‘전후(戰後) 최고의 고고학적 발견’이라며 발칵 뒤집어졌었다.
고고학자, 역사학자는 물론이고 미술사학자, 천문학자들까지 총동원되어 조사한 결과 무덤에서 출토된 인골이 40∼60세 정도의 성인 남자이고 이 인물은 유물로 볼 때 고귀한 신분으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당초 천황릉으로 추정되었던 고분이 양식 면에서 횡혈식 석실 고분으로 한반도 무덤 양식이었던 데다 무덤 안 벽화들도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나 볼 수 있는 사신도, 별자리 그림, 주름치마를 입은 여인 그림이어서 다시 한 번 일본 사회를 놀라게 했다. 백제 아지사주 부자 일행이 살던 아스카 히노쿠마의 오미아시신사 일대가 백제 도래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다카마쓰 고분 주인이 한반도계일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동북아재단 연민수 역사연구실장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7세기 후반 멸망한 고구려 백제 유민들이 왜로 집단 망명하는데 이때 온 고구려 망명 왕족이 아닌가 추정할 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