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마쓰 고분은 1970년 10월경 마을사람이 생강을 저장하려고 굴을 파다가 내부에서 오래된 잘 다듬어진 돌을 발견한 것이 1972년 3월 발굴을 시작하여 채색벽화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국 역사교과서에도 나오는데 주로 일본에 전해진 고구려 문화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언급되고 있다. 이곳에서 발굴된 다카마쓰 고분은 북한 남포시 강서구역에 있는 고구려의 수산리 고분벽화와 매우 흡사하단 점을 강조하며 고대 한반도 문화가 일본에 큰 영향을 주었음을 설명할 때 사용된다.
교과서에는 다카마쓰 고분 벽화 속 인물들이 입고 있는 옷차림(색동 주름치마 등)이 고구려의 복식과 유사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삽화나 사진이 함께 실리는 경우가 많다.
다카마쓰 고분에서는 당시까지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벽화, 그것도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나 볼 수 있는 사신도, 별자리 그림, 여인행렬도가 나와 일본에서 전후 최고의 고고학적 발견이라며 큰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아쉽게도 이미 오래전에 도굴되어 수습한 유물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다카마쓰 고분은 직경 23m, 높이 5m의 흙무덤으로 공주 송산리 고분이나 부여 능산리 고분의 봉분정도 크기인데 최종적으로 710년 무렵에 조성된 것으로 고증되었으며 이는 고구려가 멸망한지 40여년이 지난 시점이다.
고분 앞에는 전시관이 있어 고분 내부를 실물 크기로 복원해놓고 도굴구멍을 그대로 뚫어놓아 안쪽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내부는 잘 다듬어진 판석으로 구축한 길이 2.6m, 높이 1.1m, 폭 1m의 작은 석곽묘이다. 석곽은 생각보다 작아 보였지만 벽화의 인물도는 아주 생생하게 보인다.
다까마쓰(高松) 고분 입구에 커다란 소나무를 심은 것이 다까마쓰를 뜻하는 것을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실물크기로 복원한 고분 내부의 벽화는 교과서 도판에서 보았던 현무 등 사신도와 천장의 별자리, 특히 여인 군상도는 고구려 벽화에서 보고 느꼈던 그대로였습니다.
고분 조성시기가 고구려가 멸망한지 40년이 지난시기라고 고증되었습니다. 이는 고구려 멸망 후 대규모로 아스카지역으로 이주한 고구려계 귀족 도래인의 무덤이라 추측해봅니다.
고구려는 아스카 문명에 일조한 혜자와 담징 등 학승과 기술자를 파견하여 일찍부터 백제와 더불어 쇼토쿠 태자의 아스카 문명과 문화발전 혁신에 일조하였습니다.
아스카 문화는 백제를 비롯한 한반도 삼국의 영향이 크게 미쳤다는 것은 다카마쓰 고분에서도 느낄수 있었습니다.
고구려 문화의 흔적이 뚜렷한 다카마쓰 고분. 날씨 좋을 때 산책하기 충분할만큼 넓은 장소. 벽화를 볼 수 있는 자료관 입장은 5시까지.
아스카시대의 여성들은 고대 한국옷을 입고있었다 이것은 요즘 일본 젊은 여성들이 한류를 사랑하는 것과 맥락이 같다 고대에도 요즘시대의 KPOP이나 K DRAMA같은 문화적 유행이 고대 일본에서도 사랑받았을 것이다
일본 국보인 이 옛 무덤은 1972년 가시하라 고고학연구소가 이 일대를 조사하다 발견한 것이다. 일본 유물에서는 그동안 볼 수 없었던 고분 벽화가 부장품들과 대거 쏟아져 나와 일본 사회는 ‘전후(戰後) 최고의 고고학적 발견’이라며 발칵 뒤집어졌었다.
고고학자, 역사학자는 물론이고 미술사학자, 천문학자들까지 총동원되어 조사한 결과 무덤에서 출토된 인골이 40∼60세 정도의 성인 남자이고 이 인물은 유물로 볼 때 고귀한 신분으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당초 천황릉으로 추정되었던 고분이 양식 면에서 횡혈식 석실 고분으로 한반도 무덤 양식이었던 데다 무덤 안 벽화들도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나 볼 수 있는 사신도, 별자리 그림, 주름치마를 입은 여인 그림이어서 다시 한 번 일본 사회를 놀라게 했다. 백제 아지사주 부자 일행이 살던 아스카 히노쿠마의 오미아시신사 일대가 백제 도래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다카마쓰 고분 주인이 한반도계일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동북아재단 연민수 역사연구실장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7세기 후반 멸망한 고구려 백제 유민들이 왜로 집단 망명하는데 이때 온 고구려 망명 왕족이 아닌가 추정할 뿐”이라고 말했다